디자인 회의는 디자인을 위한 게 아니다
미학을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는 시스템, 예술가를 그의 작품과 분리하는 시스템, 개인의 작업을 파편화하는 시스템, 위원회로 만들어내는 시스템, 창작 과정을 다지듯 갈아버리는 시스템은, 결국 작품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까지 깎아낼 것이다.
디자이너 책상에 파프리카 한 조각이 도착했다.1 CEO 부인이 새 로고에 쓰라고 보낸 채소였다. CEO가 주말에 시안을 집으로 가져갔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손님들이 한마디씩 보탰고, 아내가 자기 눈에 들어온 색에 가장 가까운 채소를 골랐다. 월요일 아침, 디자이너는 그 채소를 책상에 올려두고 컬러 픽커를 대야 했다. CEO의 한 줄이 "아내가 고른 이 색으로"였기 때문이다.
작은 회사의 풍경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2010년 Gap의 새 로고는 6일을 못 버텼다.2 파란 박스를 버리고 헬베티카로 갈아탄 그 시안은, 글로벌 SPA 본사의 내부 회의실 전원 동의를 받고 세상에 나왔다가, 6일 만에 옛 로고로 돌아갔다.
두 일화의 회의실 안에서, 디자인 자체가 잘못 결정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잘못 결정된 것은 디자인이 아니라 누가 결정에 참여했는가였다. CEO 부인은 색을 결정할 자격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Gap의 임원 회의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림일 것이다. 인프라 회의에 다섯 명, 회계 회의에 다섯 명, 디자인 회의에 열다섯 명. 회사가 50명이든 200명이든, 디자인 회의는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회의다.
회사가 디자인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가격, 해고, 시장 철수 같은 진짜 결정은 적은 인원이 내린다. 회사 안에서 중요할수록 인원이 늘어나는 영역은 내가 아는 한 디자인밖에 없다.
디자인은 의견 진입비용이 가장 낮은 영역이다
다른 의제에는 자격이 있다. DB 스키마 회의에서 인덱스 전략에 의견을 내려면 쿼리 패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회계 회의에서 자본 지출 분류에 의견을 내려면 회계 처리 원칙을 알아야 한다. 계약서 검토는 법률 언어를 읽는 사람이 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은 회의실에 들어와도 의견을 내지 않는다.
디자인은 거르지 않는다. 색은 누구에게나 보이고, 폰트 크기는 누구나 비교할 수 있고, 로고의 균형은 누구나 "어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의견을 내는 데 필요한 진입비용이 회사 안 모든 의제 중 가장 낮고, 그래서 디자인 회의에 모두가 모인다.
1957년 Parkinson이 '사소함의 법칙'(Law of Triviality)으로 정리한 패턴이 이것이다.3 원자력 발전소 안건은 30분 만에 통과되고 자전거 보관소 색깔 안건은 세 시간을 끌었다는 그 관찰. '자전거 보관소 효과'(bikeshedding)라는 별명도 거기서 나왔다.
디자인은 측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증 불가한 언어로 포장된다
미리 분리해두자면, 이 글이 다루는 디자인은 브랜드, 아이덴티티, 심미 영역이지 퍼널/CRO 디자인이 아니다. 결제 페이지의 폼 필드 하나를 빼면 전환율이 몇 퍼센트 오르는지는 A/B 테스트가 거의 즉시 답해준다. Expedia가 결제 폼 필드 하나를 빼서 연 1,200만 달러를 더 번 사례4가 그런 영역이다. 그쪽 디자인 회의는 길지 않다. 측정이 회의를 거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회의가 길어지는 디자인은 측정이 닿지 않는 영역, 즉 브랜드와 아이덴티티와 심미다.
다시 다른 의제와 비교하면 차이가 또렷하다. 개발은 측정된다. 코드를 잘못 짜면 응답 속도 그래프가 솟고, 에러율이 올라가고, 다운타임이 발생한다. 회의실의 어떤 말도 그 숫자를 거짓말로 만들지 못한다. 회계는 분기 말 감사가 모든 분류 결정을 거꾸로 검증한다. 법무는 계약서가 잘못 쓰이면 분쟁에서 진다.
디자인은 그렇지 않다. 새 로고가 좋았는지를 6개월 뒤 누가 어떻게 판정하는가. 매출이 올랐다면 로고 덕분인가, 광고 덕분인가, 시장 사이클 덕분인가. 매출이 떨어졌다면 로고 탓인가, 다른 모든 변수 탓인가. UX 측정 권위인 Nielsen Norman Group조차, 브랜드 인지 같은 무형 효익의 ROI 예측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인정한다.5 측정이 거르지 못한다.
측정이 거르지 못하는 영역에서, 결정은 반증 불가한 언어로 포장된다. 회의실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들 — "브랜드 정체성에 맞다", "사용자 정서에 와닿는다", "톤이 맞는다" — 은 모두 사실 진술이 아니다. 반박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라, 그 의견을 합리화하는 느낌의 어휘로 포장한 자기 보고다. 누구도 "당신이 말한 그 브랜드 정체성은 측정상 틀렸다"라고 받아칠 수 없다. 숫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어휘 자체가 측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 이론가 Karl Weick은 1995년에 조직은 "정확성"(accuracy)이 아니라 "그럴듯함"(plausibility)으로 굴러간다고 정리했다.6 회의실의 합의는 사실을 좇는 게 아니라 그럴듯한 서사를 좇는다는 관찰이다. 디자인 회의는 그 메커니즘이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무대다. 그럴듯하기만 하면 어떤 의견이든 살아남는다.
무너진 다리는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잘못된 디자인은 잘못됐다고 말할 어휘가 없다.
그래서 위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측정이 거르지 못하고 어휘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정은 누군가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 회의실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다. 데이터 기반 결정 운동에서 '최고 임금자의 의견'(HiPPO, Highest Paid Person's Opinion)이라는 말로 비판하는 그 패턴이다.7 측정이 합의의 균형추 역할을 못 할 때, 그 균형추 자리는 위계가 차지한다. 다른 의제는 측정과 자격이 위계를 어느 정도 견제해주는데, 디자인은 그 견제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직급이 비슷하고 권한 경계가 흐려진 평탄한 조직일수록 이 그림이 더 또렷하다. 위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 회의 발언권은 자기 자리를 가시화하는 거의 유일한 도구가 된다. 디자인 회의는 그 무대를 가장 값싸게 빌려준다. 의견을 내는 데 자격이 필요하지 않고, 낸 의견을 반증할 어휘도 없으니까.
위원회로 정한 디자인은 망해도 책임자가 없다는 사실8 — 심리학의 '책임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이 조직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 — 또한 같은 그림의 부산물이다. 누구의 결정인지가 흐려지면, 누구의 결정이 좋았고 누구의 결정이 나빴는지를 회사가 학습할 수 없다. 좋은 안목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신호가 회사 안에서 사라지고, 회사는 자기 안에서 그 안목을 키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비대칭의 비용
이 메커니즘의 비용은 두 곳으로 간다. 디자이너의 시간과 결과물의 무난함.
디자인 회의에서 디자이너는 보통 가장 적게 말한다. (내가 거쳐온 회의 대부분에서 그랬다.) 1픽과 이유를 가져온 사람이 가장 말을 적게 하는 자리, 그게 디자인 회의다. 그 침묵은 동의가 아니라 피로다. 자기 설계 의도가 의견 진입비용 0의 의견들에, 그것도 반증 불가한 어휘에 갇혀, 천천히 깎여 나가는 시간을 매주 반복하는 사람의 침묵이다.
영화 편집실에 마케터, 개발자, 회계, 대표가 모여 컷을 결정한다고 상상하면 우습다. 디자이너의 회의실은 왜 우습지 않은가.
결과물도 비용을 진다. 결정 대용품으로 운용된 디자인은 무난해진다. 각자 한 줄씩 더해 만든 평균이고, 회사 밖 사용자가 보는 화면은 그 평균에 가까워진다. "낙타는 위원회가 디자인한 말이다"(A camel is a horse designed by committee)라는 익명의 격언이 그 결과물을 정확히 짚는다.
디자인을 넘어
디자인은 그 스펙트럼 위의 한 점일 뿐이다.
조직에는 측정이 닿지 않는 영역들이 흩어져 있다. 회사 문화. 장기 전략. 채용 평가. 분기 평가 면담. 브랜드 포지셔닝. 모두가 회의에 들어가고, 모두가 의견을 내고, 결정은 "정체성에 맞다", "장기적으로 옳다", "그 사람 fit이 좋다", "그 평가는 정성적으로 보면 맞다" 같은 반증 불가한 어휘 안에서 내려진다. 디자인 회의의 메커니즘이, 거기에도 똑같이 작동한다.
Kaplan과 Norton은 평균 기업 시장 가치의 75% 이상이 측정되지 않는 무형 자산에서 온다고 정리했다.9
그리고 이 모든 회의실에 모이는 사람들의 시간 — 곧 월급 — 은 어디서 나오는가. 측정이 거르지 못하는 영역에서 회사는 결과를 측정 못 할 뿐 아니라,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쓰인 과정의 비용도 측정 못 한다. 매주 같은 회의에 같은 인원이 같은 어휘로 같은 결정을 반복한다. 사실상 임금을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측정 가능한 영역의 회의는 회의 자체의 비용을 의식한다. 그 의식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어떤 풍경이 나오는지를 나는 한 핀테크에서 봤다. 15명이 매일 아침 대회의실에 모여 30분짜리 스탠드업을 했다. 한 사람의 하루치 일과가 매일 회의실에 깔리고 시작됐다. 디자인 회의가 길어진다는 말은,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의 월급이 길게 지출된다는 말이다.
처방 다섯 줄
- 디자이너가 1픽과 이유를 가져온다.
- 명시적 반대가 없으면 채택한다 (lazy consensus).
- 리더의 개입은 브리프 단계에서 끝낸다.
- 산출물 단계의 발언은 reaction까지만 (Jobs와 Ive의 모델).
- 반증 불가한 어휘로 반대하지 않는다 —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대신 "이런 이유로 이렇게 바꿔달라" 한 줄.
마치며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측정 불가한 영역에서 위계를 행사할 자격이 가장 약한 자리, 회의실에 끼어 앉은 엔지니어의 자리에 있었다. 회의실에서 입을 못 열었고, 1안에 조용히 동의했을 뿐, 이 회의가 길어질 이유가 없지 않냐는 말 한 줄을 보태지 못했다.
그저 "그게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좀 아니라"의 이유를 찾다가 이 글이 시작됐다. 다음 회의에서 입을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자는 자로에게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 자로는 모르는 것도 안다고 우기는 버릇이 있었다.
2500년 전의 자로가 오늘날 곳곳에 환생해 있다.
- 영국 디자이너 Graham Smith가 자기 블로그에 적어둔 일화. CEO가 주말 사이 가족 식탁에서 시안을 돌렸고, 부인이 '이 색이 좋다'며 채소를 사무실로 보냈다. The Horror of Logo Design by Committee (imjustcreative, 2014)
- Gap은 2010년 10월 4일 새 로고를 공개했다. 파란 박스를 헬베티카 워드마크 + 작은 파란 그라데이션 사각형으로 교체. 6일 만에 옛 로고로 복귀했다. 공식 입장: 'We did not go about this in the right way.' Learnings from the Gap Logo Redesign Fail (The Branding Journal)
- C. Northcote Parkinson의 1957년 책 'Parkinson's Law: The Pursuit of Progress'에 실린 우화. 위원회는 자기 능력 안의 안건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쓴다는 관찰. 자전거 보관소(bike shed)에서 별명을 따왔다. Law of triviality / Parkinson (1957)
- Expedia가 결제 폼에서 'Company' 필드 하나를 제거하고 연간 $12M 추가 이익을 본 유명한 사례. 퍼널/CRO 영역은 측정 가능성이 매우 높다. Conversion Rate Optimization Case Studies
- Nielsen Norman Group이 디자인/UX의 ROI 측정 어려움을 정면으로 다룬 글. 업계 최고 권위 기관조차 '브랜드 인지 같은 무형 효익의 ROI 예측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인정. Return on Investment for Usability (Nielsen Norman Group)
- 조직 이론가 Karl Weick의 1995년 책 'Sensemaking in Organizations'. 조직은 사후적으로 자기 결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굴러가고(센스메이킹), 이때 결정의 정확성보다 그럴듯함이 더 중요해진다. 본문은 한 발 더 나아간 주장 — 그럴듯함은 반증 불가하다. Sensemaking in Organizations / Karl Weick (1995)
- HiPPO = Highest Paid Person's Opinion. 데이터 기반 결정(data-driven decision) 운동에서 비판적으로 명명한 패턴. 객관적 근거 대신 권위로 결정이 내려지는 현상. HiPPO Effect / Jeff Gothelf
- 1964년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후 John Darley와 Bibb Latané가 정리한 사회심리학 개념. 책임을 나눠 가질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의 행동 압력이 줄어드는 현상. '다 같이 정한 것'이 '아무도 정하지 않은 것'이 되는 메커니즘. Diffusion of Responsibility / Darley & Latané (1968)
- Robert Kaplan과 David Norton이 2004년 책 'Strategy Maps: Converting Intangible Assets into Tangible Outcomes'에서 정리한 명제. '평균 기업 시장 가치의 75% 이상이 전통적 지표가 측정하지 못하는 무형 자산에서 온다.' 그들의 답은 측정을 더 잘하자는 것이고, 본문의 진단은 측정이 어렵다는 영역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머문다. Strategy Maps / Kaplan & Norton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