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을 떠나 바닥으로
내 글은 내 삶에서 자라난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자라나듯이.
에릭 호퍼가 오래 마음에 남아 있다. 부두에서 짐을 나르며 살았던 사람이고,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고, 도서관에서 혼자 읽고 쓰며 철학자가 됐고, 그러고도 대학 교수 자리를 거절한 사람이다.
나도 그런 삶을 동경해왔다. 그런데 나는 손재주가 없고, 지식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그 안에서 그렇게 멋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질문이 이 글의 시작이다.
나는 한국에서 이름값 없는 학교에 들어갔다. 대전에 위치한 어느 학교였고, 선배도 몇 기수 없었다. 군대 간 사이 학교는 '이름값' 있는 학교와 통합되어 있었다. 그 덕에 30대 중반에 시작한 개발 커리어의 첫 직장을 비교적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다. 200명 넘는 핀테크 스타트업이었다. 나중에 친해진 직장 동료들의 말을 건너건너 들어보면, 학교 땜에 뽑힌 셈이었다. 이력서에 그게 적혀 있으면 서류 합격률이 좀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내 실력을 말하진 않는다. 내가 만든 이름값도 아니다. 10년도 더 된 졸업장이 아직도 영향을 미친다는 게, 어딘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한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 구직 활동을 할 때 면접에서 갖은 굴욕을 당했다. 면접관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면접에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이름값'을 보고 기대한 바가 있는데, 나는 동료로서 같이 일하기에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 둥지를 벗어난 이후로 생존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 적이 없다. 좀 다니다 보면 회사가 돈이 없다고 했고, 싸늘한 분위기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며칠 뒤에 그 소문은 으레 누구누구가 그만 둔다더라, 회사에서 나가라 했다더라 하는 식으로 확인됐다.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집에 돌아와서도 신경 쓰이는 일들이 너무 많다. 차라리 일 때문에 머리 쓰는 거라면 푸념할 일도 아닌데.
그 시기부터 외주든 정규직이든 가리지 않았다. 백엔드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론트엔드도 만졌고, 다른 스택도 건드렸다. 면접에서 굴욕을 당하고 얼어붙어가는 IT 시장을 체감하면서,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현실적으로 이름값과 실력 둘 다 잡을 수는 없었다. 알고리즘 시험과 시스템 설계 시험을 준비해서 큰 회사를 노리는 대신, 영역을 넓혀서 혼자 설 수 있는 개발자가 되는 쪽을 골랐다.
알고리즘 문제와 시스템 설계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추구하는 실력의 결과 거리가 있었다. 시험을 잘 본다는 사실이 일터의 실력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학교 통합으로 이름값을 얻은 경험에서 이미 배운 결이다. 두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자리는 대체로 큰 트래픽과 많은 유저를 다루는 자리이지, 혼자 설 수 있는 개발자가 되는 자리는 아니다. 앞으로는 좁은 세그먼트를 파는 적은 인원의 스타트업이 더 많아진다고 봤다. 그쪽 세계에서 내가 더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한강 뷰 사옥, 사내 카페테리아, 따뜻한 점심 식대가 있던 안락한 세계에서, 어느 소규모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기니 환경 격차에 놀랐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화장실에 페이퍼 타월이 없는 건물이었다.
그 안락한 세계가 그립기도 했다. 이름값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받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고민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선택은 일리 있었고, 번복할 만큼 힘들지도 않았다. 대충 할 만했다는 뜻이다. (페이퍼 타월 없으면 옷에 닦아도 된다.)
'이름값'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많은 것들이 굴러갔다. 예전엔 잡념에 갇혀 첫 삽도 뜨지 못하던 것들이다. todoglow, devglow 같은 개인 프로젝트도 거기 들어간다. 실제로 만들고 운영해보면서 개발이 더 깊이 잡혔다.
며칠 전엔 todoglow의 백엔드를 Cloudflare Workers로 옮겼다. (서버리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적어두었다.) 요금제 때문이었는데, 옮기다 보니 Neon, Supabase 같은 '요즘' DB 서비스들이 왜 HTTP 레이어로 DB 접근을 제공하기 시작했는지를 자연히 알게 됐다. 워커 환경에서는 일반적인 TCP 커넥션이 길게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접 굴리며 본 결이 권위자의 말보다 단단했다.
이름값의 세계에서 벗어나니 위험과 불안정이 삶을 흔들었지만, 대신 학습자가 되었다. 동경하던 삶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
직접 만든 실험실에서 구르다 보면 계획에 없던 깨달음을 수확한다. 지난 깨달음과 연결되어 다음 차원의 깨달음을 낳는다. 이 루프는 깊은 즐거움을 준다. 내 직업이 1년 뒤에 무엇으로 불리든, 이 일을 깊이 익히면 이후의 삶도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감각이 있다.
얼마 전 누군가가 내게 '경제적 자유'를 주제로 물었다. "젠슨 황은 왜 아직도 일을 하는 걸까요." 며칠 곱씹다 보니, 그의 자유는 재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지에서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오늘 모든 재산이 몰수당해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을 사람이다.
산을 움직이는 기술이 있으면, 산을 움직인다는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부두 노동자였던 호퍼가 한 말이다. 이름값이라는 건 결국 그 믿음의 한 종류였구나, 하고 요즘 생각한다.